퍼시픽 림 : 업라이징 - 예고편이 나를 속였어!




스포일러 있습니다.


4년 반 만에 나온 속편입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영화지요. 1편의 흥행이 미국에서 좋지 못했기 때문에 속편은 무리인가 싶을때 중국에서 기사회생의 한방이 터져줘서 2편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별로 순탄하진 않았고, 결국 길예르모 델 토로가 감독직에서 하차하고 스티븐 S. 드나이트가 그 뒤를 잇는 상황까지 왔어요.

그래서 1편 팬 입장에서는 나와준 것만으로도 고맙긴 한데 여러모로 불안요소가 많은 영화였습니다. 제작 과정만 해도 그런데 처음으로 공개된 예고편은 그런 우려를 더욱 불어나게 만들었죠. 예고편은 정말 중국 자본의 영향이 짙게 드러났으며, 요즘 세상에 무슨 쌍팔년도에도 지루하다고 느꼈을 '세계는 우리가 구한다!'는 연설씬을 메인으로 편집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핵심 전투씬들도 영 재미없어보이게 편집해놓았지요.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예고편이 안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놀라운 속편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설마 이 정도로 잘 나와줄 줄은 몰랐어요. 보는 내내 대만족이었고, 나와서도 같이 본 일행 모두 대흥분 상태였습니다.


역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전투씬들입니다. 1편에 비해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기도 한데, 기술과 예산의 한계로 칙칙한 배경에서 잘 알아보기 어려운 액션을 펼쳤던 1편에 비해 이번에는 모든 것이 알아보기 쉬운 상황에서 호쾌하게 펼쳐집니다. 게다가 전투 시퀀스도 굉장히 다양해요. 일단 카이주하고만 치고 받는 게 아니라 예거 vs 예거전이 상당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만 봐도 그렇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존재했던 로봇물들의 클리셰를 훌륭하게 대형 스크린에 펼쳐놨다고요.

1편에 비해 예거들의 육중함이 줄어든 대신 보다 스피디해진 느낌을 살려서 역동적인 액션을 펼치고 있고, 지형지물의 파괴를 통해서 부족한 부분들도 보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카이쥬와 치고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시츄에이션을 보여주는 것이 강점인데, 노골적으로 에반게리온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라거나 일본의 특촬물 클리셰가 듬뿍 압축되어 있는 도쿄 대난투 같은 부분이 저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 바닷속에서 아웅다웅했던 1편의 최종전에 비해 2편의 도쿄 대난투는... 크으! 예고편을 보면 이 부분이 정말 재미없어 보입니다만, 저 예고편을 만든 자를 매우 쳐라! 지금까지 봤던 도쿄를 때려부수는 전투씬 중 역대 최고로 꼽겠습니다. 이 부분은 정말 괴수 특촬물이건 히어로 특촬물이건 일본 특촬물을 보면서 로망을 키운 사람이면 엄지손가락을 처억! 할 수밖에 없다고요. 예거들과 카이주가 치고 받는 부분만 봐도 그런데 카이주가 3단 합체 하는 부분에 가면...


아... 너무 멋지다...


멋지다, 뉴턴! 해냈구나 뉴턴!

네가 진정한 이 시대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다!


게다가 일본 특촬물에서는 보통 합체 괴수가 짜잔! 하고 나오면 등장했을 때의 임팩트가 바로 절정 부분이고 그 다음부터는 그냥 피시식- 해버리고는 하는데...

여기선 그런거 없음. 셋이 합체해서 탄생한 메카 카이쥬는 그야말로 쩔어주는 포스를 보여줍니다. 멋지다! 짱쎄다! 이건 진짜 역대 합체괴수 중 최강의 포스가 아닐까요?


캐릭터도 좋았습니다. 딱히 깊이 있는 캐릭터 묘사를 보여주진 않지만 1편과 비교하면 캐릭터 서사가 훨씬 나은 느낌입니다. 일단 마코 모리의 캐릭터만 봐도 그래요. 1편과 달리 파일럿도 아닌데도 훨씬 나은 대접입니다. 1편에서 그렇게 까였던 것도 키쿠치 린코의 연기력 문제가 아니라 그냥 각본과 캐릭터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죠.

처음 주인공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아, 이거 또 범죄자 루저 주인공이 갱생해서 영웅되는 이야긴가?'하고 맥이 풀렸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어서 참 좋았고, 천재 공돌이 아마라와의 만남은 이거 완전 전형적인 보이 밋 걸 스토리를 의도한 게 노골적이라 와하하하. 뭐 주인공과의 나이차 등등으로 일본 만화스럽게 흘러가진 않지만.


근데 보다 보면 이거 참, 미국인은 되게 싫어할 것 같은 이야기긴 합니다. 인류의 구심점이 된 기지도 중국에 있고(1편에서도 그랬지만),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슈퍼 테크놀로지 기업도 중국 기업이고, 악당은 미국인이고... 게다가 마치 여태까지 미국인이 '영어로 해!' 한걸 되돌려주듯이 '중국어로 해!' 라는 소리를 듣는 미국인...

1편이 중국 덕분에 기사회생해서 2편이 나올 수 있었고, 중국 자본이 들어간 만큼 중국뽕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뭐 당연하게도 불호가 많은데, 근데 잘 생각해 보면 오히려 1편보다 중국뽕이 줄어든 느낌도 듭니다.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한 일본뽕과 중국뽕은 사라졌어요. 중국뽕의 경우 초중반까지 악역인 것 같다가 후반부에 격렬한 태세전환을 보여준 리웬 샤오가 바로 중국뽕을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캐릭터가 미국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작중에서 무리수였던 부분들을 포함해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각본에서 이런 캐릭터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게 중국인 캐릭터였을 뿐이지.


뭐, 한국인 입장에서는 원래 등장 예정이었던 한국 예거가 중국측의 요망으로 다 잘렸다는 것만으로도 중국 비중이 큰 부분에 대해서 불만을 품을 만하지만!


저는 각본도 1편보다 좋았습니다. 특히 그냥 카이쥬가 또 쳐들어와서 전투를 벌이고 마는 게 아니라는 점이 좋았어요. 이 영화는 전편에서 마무리 지은 이야기, 변화한 세계를 재료로 삼아서 적극적으로 속편으로써의 이야기를 만들어갔고 그건 꽤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스토리는 굉장히 클리셰에 기대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앞에서 보이 밋 걸이라고 이야기했던 제이크와 아마라의 만남부터가 그렇죠. 천재 공돌이 미소녀가 주인공과 만나서 과거에 PTSD 생길 만한 경험을 했다는 분위기를 좀 풍겨주면서 얽히는 거라고요. 여기에 대해서 딱히 친절한 설명은 없어요.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서브컬처를 접해온 독자라면 척 하면 착하고 알게 되는 부분들이고 이야기 전체가 그런 방식으로 굴러가요.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 특촬물이나, 혹은 WWE 프로레슬링과 비슷합니다. 그 장르를 구성하는 기믹과 약속들이 존재하는데 이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튀어보일 수 있는 요소들이에요. 서브컬처, 그중에서도 로봇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만족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 작품이 속한 장르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적극적으로 로봇물 클리셰를 활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짚어야 할 포인트를 다 짚으면서도 로봇물로서의 정체성 - 어쨌거나 내용상 로봇의 활약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점을 달성해냈다고 봅니다. 하지만 좀 더 인간 드라마의 비중을 높인 친절한 스토리로 만드는 편이 일반 관객에게 더 어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아줘서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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